초록 |
최한기(崔漢綺, 1803~1877)는 19세기 조선에서 동서의 학술을 종합하여 “기학(氣學)”이라고 하는 독창적인 사상체계를 만들어낸 것으로 알려진 실학자이다.최한기는 “심학(心學)을 전공하는 자는 제규제촉(諸竅諸觸; 감각기관)을 비루하게 여기고 성명(性命)의 이치를 탐욕스레 추구한다.” 라거나 “심학의 사람은 안을 지키고서 밖을 잊고…….”라고 하듯이 심학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많이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저술을 자세하게 검토해 보면 그는 오히려 심학에 조예가 깊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왕양명(王陽明)의 사구교(四句敎) 해석을 둘러싼 소위 “천천증도(天泉證道)”는 중국 양명학파가 분열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지만 최한기는 이것에 대해 그 당사자인 왕기(王畿)와 전덕홍(錢德洪) 양자의 설을 조정하는 안을 제시했다. 그는 또 심성의 선악허실(善惡虛實)을 둘러싼 기존의 의논에서는 사람이 태어난 후의 경험이 무시되고 있는데 경험 이전의 인간 본성에 대한 의논은 본질적으로 불가지론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람이 양지(良知)를 타고난다고 하는 설은 기질의 편벽됨을 살피지 않는 채 자기 기질에 따라 판단한 것을 “양지”라고 착각할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했다.이와 같은 점에서 그는 아프리오리인 천부(天賦)의 앎은 존재하지 않고 사람이 그것으로 여기는 것은 기실 태어난 후의 견문에 의해 얻어지는 것일 따름이라는 생각을 도입한다면 심학에 계발하는 바가 있게 되고, 후세 사람들의 노고도 줄여서 “심학지후(心學之後)” 즉 “포스트 심학”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그런데 최한기가 말하는 “기(氣)”의 개념은 동양의 전통적인 그것과는 매우 이질적인 것이지만 기학의 근간인 “기”, “신기(神氣)”의 기원에 대해서는 종래 그다지 많이 연구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양명학의 “양지”로부터 천지만물을 일체로 삼는 우주의 본체라는 측면과 몸의 주재로서의 측면을 이어받은 한편으로 사람이 타고난 도덕성의 측면을 제거한 것이었다.최한기는 감각기관으로부터 받은 자극이 영혼에게 전해지고 지각과 판단, 그리고 호오의 감정이 일어난다고 하는 생각을 한역 스콜라철학의 아니마론에서 배웠다. 한편 본질적으로는 순수하고 맑디맑은 질을 가지고 있으나 감각적 경험에 “습염(習染)”되는 것으로 지각과 판단, 호오의 감정을 일으키는 인식의 기반으로서의 사람의 신기는 정제두(鄭齊斗)를 비롯한 조선양명학(朝鮮陽明學; 강화학파)의 사람이 타고난 것으로 선에도 악에도, 요순(堯舜)도 범부(凡夫)도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간직하는 생지리(生之理)로서의 “순기(純氣)”, “정신진기(精神眞氣)”의 사상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