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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정보

朝鮮後期 王室과 華溪寺의 佛敎史的 價値

논문 개요

기관명, 저널명, ISSN, ISBN 으로 구성된 논문 개요 표입니다.
기관명 NDSL
저널명 新羅 文化
ISSN 1229-0939,
ISBN

논문저자 및 소속기관 정보

저자, 소속기관, 출판인, 간행물 번호, 발행연도, 초록, 원문UR, 첨부파일 순으로 구성된 논문저자 및 소속기관 정보표입니다
저자(한글)
저자(영문)
소속기관
소속기관(영문)
출판인
간행물 번호
발행연도 2013-01-01
초록 nbsp; nbsp;화계사는 고려전기 법인국사 탄문이 창건하였다. 창건 이후 조선전기까지의 기록은 전무한 실정이다. 조선 건국 이후 불교탄압으로 인한 쇠퇴가 주요원인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부터 화계사는 서평군과 덕흥군, 그리고 조선후기 흥선대원군과 왕실비빈들의 발원과 재정적 지원에 의해 점차 사찰의 규모를 확장해 갔다. 본격적인 중창이 이루어졌던 세도정치 시기에는 김정희와 흥선대원군의 사제관계에서 비롯된 추사학파의 교류와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진경문화의 흔적들이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화계사는 세자의 강건함을 비롯한 왕실의 번영을 기원했던 조선후기 왕실의 원찰기능을 점차 강화시켜갔고, 그에 따른 전각을 비롯한 수행과 대중신앙을 수행할 수 있는 재정적 기반이 안정되어 갔다. nbsp; nbsp;한편 화계사 관련 기록은 사찰이 차지하고 있는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지대함에도 불구하고 그 관련 자료와 흔적이 일천하여 안타깝다. 화계사의 전후사정을 파악할 수 있는 『華溪寺略誌』가 편린을 모아 화계사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다. 다만 1938년 찬술된 略誌의 내용은 적지 않은 기록상의 모순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첫째, 고려전기 개창주 탄문과 화계사 관련기록이 略誌외에는 찾아 볼 수 없다는 것, 둘째, 1522년 화계사를 옮겨 중창시키는데 기여했던 결정적 조력자 西平君의 실체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 셋째, 1559년 중창에 기여했던 덕흥대원군이 30세로 별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시기에도 직접 중창작업에 조력했다는 사실, 셋째, 현판 '寶華樓'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작품이 아닌 위당 신헌의 작품이라는 것 등이다. 이러한 오류는 화계사의 변화뿐만 아니라 그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감소키고, 후대의 평가를 절하시키는 요인에 해당된다. 관련 자료의 부재로 인한 불완전한 가치 규명은 화계사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와 문화가 지닌 고유성을 규명하는데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지닐 수밖에 없다. nbsp; nbsp;결국 화계사의 불교문화사적 가치를 객관적으로 규명하고 현대적 계승을 위해서는 관련 자료의 광범위한 수집과 함께 현대불교문화와의 접목을 통한 계승과 발전이 이루어져야 한다.
원문URL http://click.ndsl.kr/servlet/OpenAPIDetailView?keyValue=03553784&target=NART&cn=NART69881908
첨부파일

추가정보

과학기술표준분류, ICT 기술분류,DDC 분류,주제어 (키워드) 순으로 구성된 추가정보표입니다
과학기술표준분류
ICT 기술분류
DDC 분류
주제어 (키워드) 화계사(Hwagyesa),탄문대사(the Great monk,Tanmun),덕흥군(Deokheung-gun),김정희(Kim jeong hee),흥선대원군(Heungseon taewon-gun),왕실신앙(Royal family's religious beli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