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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이 자살을 한다? 안 믿는 분들이 훨씬 많은 게 사실이다. 왜냐하면 모든 생물들은 살기 위해 태어나는 게 기본인데 자살이라는 것은 이 명제에 굉장히 모순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 그것은 사람 스스로도 자랑스러워하는 잘 발달한 대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뇌피질의 창조적이고 조직적이며 모든 신경을 통제하는 중추기능은 그 역할만큼 또한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즉 엄청난 자극에 의해 한번 그 질서가 흐트러지면 좀처럼 돌이키기 힘들거나 영구적으로 못 쓰게 돼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비정상적인 행동(우울증, 폭력)들이 나타나거나 아노미(anomie)에 빠지면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럼 동물들의 경우는? 사람의 예와는 달리 그만큼 대뇌가 발달하지 못하여 정신적인 충격에 의한 자살은 드물다고 본다. 하지만 자살의 의미가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라고 할 때 동물들도 자살을 할 수 있다는 증거들은 얼마든지 있다. 가령 몇 가지 예를 보자면 고래의 자살(Stranding) ‘스트랜딩(Stranding)’, 고래가 해안가로 밀려와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는 현상을 일컫는다. 작년에도 호주의 해안가에 대규모의 범고래 떼가 밀려와 죽는 일이 발생했었다. 이런 일은 장소는 조금씩 다르지만 해마다 세계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이한 자연 현상 중 하나이다. 그리고 최근 들어 더욱 많이 일어나고 있다. 한때 고래사냥이 유행했을 때는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칼을 들고 달려들었겠지만 고래의 개체수가 해마다 줄어들고, 대부분의 고래종이 멸종위기 상황에 처한 요즘은 고래를 살리기 위해 물통이나 물 호스를 들고 달려간다. 이 현상을 두고 학자들은 지구온난화, 먹이의 고갈, 해양오염 심지어 어군탐지기나 군함에서 쏘는 초음파의 영향이라고 까지 말한다. 또 일부 병리학자들은 이런 고래를 해부해 보고 위장병이나 전염병을 의심하기도 한다. 나 역시 해안가에서 이런 식으로 밀려온 돌고래 두 마리를 구해서 보내준 적이 있다. 그들은 갯벌로 올라와 있었지만 피부에 상처만 조금 입었을 뿐이었다.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면 가끔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한다. 아무튼 비상 출동한 우리는 대학 수족관에 가져가서 연구를 해야 한다느니, 그냥 보내주어야 한다느니 의견이 분분하다가 결국 119잠수부들이 들어가 깊은 물속으로 다시 되돌려 보냈다. 그 후 다시 이런 일은 없었지만 돌고래처럼 삶에 충실하고 낭만적인 동물들이 일부러 얕은 곳에 밀려온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자살하는 것과 거의 진배없는 행동이다. 북극레밍(Lemming)의 집단이주 현상동물들 자살이야기가 나올 때 대표적으로 거론 되는 동물이 레밍이다. 일명 ‘나그네쥐’라는 레밍들은 먹이환경이 좋아 개체수가 너무 늘어나면 일부 그룹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이동을 시작한다. 거의 맹목적으로 선두를 따라가는 이런 동물 떼는 선두가 방향을 잘못 잡아 바다나 호수로 안내하면 그대로 빠져죽게 된다. 아마도 수명이 짧은 이 설치류들에게 물에 대한 두려움이란 걸 원초적으로 각인 시키기엔 진화의 시간이 너무 짧았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행동을 자살로 봐줄 순 없다. 더 좋은 곳에 살려고 이주하다가, 모르고 아니면 관성으로 전진하는 떼에 밀려서 어쩔 수 없이 죽는 것이지 삶을 스스로 포기 한 행동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뒤에 남겨진 조금의 숫자는 살아 남고 새 터전을 찾아간다고 한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집단행동에서 자살로 볼 수 있는 사례가 있는데 ‘누’의 경우가 그렇다. 건기에 아프리카 사바나에선 풀과 물을 찾아가는 초식동물의 대이동이 시작 되는데, 그 이동 중 맨 앞에 서는 우두머리 ‘누’가 맨 먼저 악어 밥이 되거나 거센 물살에 휘말려 죽으면 ‘반면교사(反面敎師)’로 뒤에 있는 것들이 살아 남는다. 동물들의 세계에서 우두머리는 먼저 희생할 줄 아는 동물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들이야말로 집단을 위한 자살을 선택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침팬지와 원숭이의 자살 성숙한 침팬지의 겨우 보통 I.Q 70정도의 지능을 가진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인간에 빗댄 수치지 그들의 본능과 학습을 합쳐보면 개체나 무리에 따라 훨씬 더 합리적인 행동이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의도적인 자살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침팬지의 어머니’로 불리는 동물학자 ‘제인구달’의 침팬지 관찰 예에서 어미 ‘플루’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죽은 아들 ‘플린트’의 이야기가 자살의 사례로 자주 회자되지만 이것은 침팬지가 지능이 높아서 라기 보다는 어미를 잃은 새끼동물들이 통상적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부모상실증후군'이다. 야생에서 독립하기 전의 새끼에게는 어미 곁에 붙어 있는 것이 삶의 법칙이고 불문율이다. 어미의 부재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쉽게 인간과 친해질 수 있는 침팬지의 특성상 그냥 관찰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이 새끼를 살려보려 했다면 상황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겪은 다람쥐원숭이 사건의 경우는 자살이라고 불러도 타당할 만큼 극적이었다. 처음으로 새끼를 낳은 다람쥐원숭이 어미가 있었다. 그런데 이 새끼는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죽어 버렸다. 보통 이 원숭이 같은 소형 원숭이들은 새끼를 등에 업고 다닌다. 새끼도 붙잡는 손아귀 힘이 대단해서 절대 떨어지질 않는다. 그러나 새끼가 죽은 날은 이상하게도 새끼를 어미가 안고 있었다. 젖을 주나 봤더니 이미 새끼가 죽어서 축 쳐진 상태였다. 그럴 경우 보통은 어미를 쫓아서 새끼를 떨어뜨리게 한다. 그날도 긴 장대를 이용해 어미에게서 새끼를 분리한 후 통상적인 부검과정을 거치고 바로 묻어 주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그 어미는 일체의 먹이와 일상적인 활동을 거부하더니 끝내 한 자리에 그대로 못 박혀 죽고 말았다. 이 어미의 죽음은 ‘자살’이라는 병명이외에 달리 쓸 말이 없어 진료부에 그냥 자살로 기록했다. 이후 다른 원숭이들에게 이런 일이 생기면 그냥 어미가 놓아둘 때까지 기다린다. 보통 이 기간은 하루면 족하다. 죽음에 대한 옛날 인디언들의 생각은 일종의 선택이었다. 자신이 어느 정도 힘이 빠지고 공동체에서 더 이상 역할이 없다고 판단되면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러 간다. 그저 벌판에 나가 조금 앉아 있으면 그대로 죽음이 찾아 들었고 그 자신은 동물들을 통해서 다시 대지로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일부 고승들도 이런 류의 죽음을 택한다고 한다. 동물들도 이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만일 많은 동물들이 제멋대로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사바나는 온통 해골무더기로 가득 차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물들은 죽음이 가까이 오는 것을 알고 무리를 벗어나 스스로 잡혀 먹히던지, 코끼리 같은 경우는 무덤자리(집단 무덤은 아니다.)를 찾아가기도 한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표범이 있었다. 이 표범은 산장 같은 곳에서 마치 돼지처럼 사육되던 것을 사오긴 했지만 우리가 구조해 온 것과 진배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좋은 환경에 놓여진 표범은 거의 보름동안 먹는 걸 거부했다. 그러다 죽기 일보직전에서 삶(먹음)을 선택했다. 아나콘다의 경우도 환경이 워낙 나쁘다 보니 1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빼빼 말라 있었다. 그걸 살린다고 데려와 적절한 온도(25℃)와 넓은 수조에만 넣어 주니 바로 먹기 시작했다. 이런 수많은 예를 통해 동물들은 죽음에 대해 스스로 선택할 정도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걸 엿볼 수 있다. 만일 사고라면 뭍으로 올라온 고래를 다시 돌려보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혹시 그들의 자유로운 죽음으로의 선택을 인위적으로 방해하는 일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글 : 최종욱 - 야생동물 수의사/ 저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