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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2일, 국내 민간 연구 회사인 퀀텀에너지연구소와 한양대, 고려대, 미국 윌리엄앤드메리대 공동연구진이 온라인 논문 사전 공개 사이트 ‘아카이브(ArXiv)’에서 상온∙상압 초전도체를 개발했다는 논문을 게재했다. 초전도체라 주장한 물질은 퀀텀에너지연구소의 이석배 대표와 김지훈 연구소장의 성에서 나온 L과 K, 처음 발견된 시점인 1999년의 99를 따와서 명명한 ‘LK-99’였다. 연구진은 LK-99의 초전도 현상이 섭씨 126.85°C까지 유지된다고 주장했다. 그림 1. 이석배 퀀텀에너지연구소 박사 연구진이 공개한 LK-99. 출처: Wikipedia 여기서 초전도란 특정 온도에 이르면 전기 저항이 극도로 낮아지는 현상으로, 이런 특성을 가진 물질을 ‘초전도체’라 부른다. 1911년 네덜란드 물리학자 헤이커 카메를링 오너스는 -269°C에서 수은의 초전도 현상을 발견해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그 뒤로 임계 온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초전도 물질들을 찾는 연구가 112년 동안 이어졌지만, 지금까지의 최고 기록은 -135°C다. 따라서 산업계에서는 액체질소와 액체헬륨 같은 냉매를 이용해 극저온을 구현하고, 초전도 물질을 자기공명영상(MRI) 장치와 자기부상열차 등에 제한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영상의 온도에서 인위적인 압력 변화 없이 초전도 현상을 나타내는 ‘상온 초전도체’는 물리학의 ‘성배’라 불린다. 발견되면 초전도체 활용의 걸림돌이 사라져, 자기부상열차 상용화, 장거리 무손실 송전, 양자컴퓨터, 핵융합발전 상용화를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진의 ‘LK-99’ 논문도 이러한 이유와 맞물려 화제가 됐다. 이게 사실이라면 노벨상급으로 혁명적인 발견을 한 셈이다. ‘LK-99’은 과학계와 SNS, 국내 주식시장까지 뜨겁게 달궜다. 하지만 초전도체의 꿈은 논란이 불거진 지 약 40일 만에 덧없는 ‘백일몽’으로 막을 내렸다. 지난 8월 31일 국내 검증위원회가 “재현실험에서 LK-99의 초전도성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히며 해외 연구기관의 부정적 견해를 재확인했기 때문이다. 40여 일 동안 ‘LK-99’를 두고 어떤 이야기가 펼쳐졌을까? 그 여정을 함께 살펴보자. 허술한 논문, 비상식적 발상, 불완전한 실험 영상으로 높았던 회의론 ‘LK-99’ 논문이 공개된 후 초기에는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다. 논문이 동료평가 과정을 거쳐 정식으로 학술지에 발표된 것이 아닌데다, 허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카이브에 연구 성과를 발표하는 것은 연구의 독창성을 선점하는 일종의 ‘깃발 꽂기’ 행위다. 큰 문제는 아니지만, 논문 내용 자체가 허술한데다 의구심을 자아내는 구석이 많았다는 의미다. 그림 2. 이석배 박사 연구진이 아카이브에 게재한 초전도체 논문 '최초의 상온 상압 초전도체'. 출처: 아카이브(arXiV) 학자들은 연구진이 발표한 논문 두 편에 등장하는 그래프를 지적했다. 같은 데이터로 만든 그래프임에도 y축의 단위가 달랐으며, 그래프의 특징도 일반적인 초전도체가 보이는 것과 상이했다. LK-99의 재료에 대한 지적도 많았다. 연구진은 LK-99를 황산납과 산화납, 구리, 인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는데, 마이클 노먼 미국 아르곤연구소 디렉터는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서 “전도성이 없는 광물이라 초전도체를 만드는데 적합하지 않다”고 밝혔다. 연구진이 공개한 시료의 공중 부양 영상에도 의심스러운 부분이 보였다. 초전도체는 외부 자기장을 밀어내기 때문에, 자성을 가진 물체 위에 고정돼 공중 부양하는 자기부상 현상을 보인다. 그런데 LK-99 영상에서는 시료 일부만 공중 부양한 채 진동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시료에 불순물이 섞여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해도, 초전도체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일부 누리꾼은 연구소 소재지라고 기재된 허름한 건물의 사진을 보여주며 부정적인 의견에 힘을 실었다. 그림 3. 초전도체의 대표적인 특징은 '자가부상' 현상이다. 출처: Shutterstock 이론적 근거 등장에 챗GPT 검색량 뛰어넘은 LK-99 그런데 해외 연구진의 이론적 뒷받침과 긍정적인 재현 성과가 속속 발표되면서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중국 선양국립재료과학연구소 연구진이 LK-99의 초전도성을 설명하는 논문을 8월 1일 아카이브에 등록했다. 이튿날에는 미국 로렌스버클리국립연구소 연구진도 LK-99가 이론적으로는 초전도성을 가질 수 있다는 시뮬레이션 결과 논문을 아카이브에 발표했다. 이후에도 몇몇 연구진이 LK-99를 재현했다며 시료가 공중 부양하는 동영상을 SNS에 공개하기도 했다. 그림 4. LK-99는 구글 트렌드에서 한동안 순위권에 올랐다. 이에 LK-99를 챗GPT를 넘어서는 성과로 치켜세우는 각종 밈이 등장하기도 했다. 출처: 구글 트렌드 이런 장밋빛 전망이 SNS와 언론을 통해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LK-99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커졌다. 구글 검색량을 살펴볼 수 있는 ‘구글 트렌드’에서, LK-99가 AI 열풍을 주도해 온 챗GPT보다 검색량이 한동안 더 많았을 정도였다. 주식시장도 난리가 났다. 상온∙상압 초전도체 발견이 사실이라면 훗날 산업적으로 큰 이익을 거둘 수 있어 초전도체 관련 기업들의 주가가 단기간에 급등했다. 주가 차익을 노린 개미 투자자들이 초전도체 관련 기업들을 ‘화제주’로 묶어 마구잡이로 투자한 결과다. 초전도성 ‘그런 거 없다’ 하지만 ‘기대도 있어’ 하지만 부푼 기대감은 얼마 안 가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전 세계 관련 분야 연구자들이 논문에 공개된 방식대로 시료를 제작하고 실험했지만, 초전도성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줄줄이 보고했기 때문이다. 결정타로 LK-99 한국 검증위원회가 8월 31일 재현실험 결과를 발표하면서 LK-99 논란은 해프닝으로 끝나가는 추세다. 현재까지 재현실험을 진행한 부산대, 서울대, 포항공대, 한양대 연구팀은 초전도 특성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예시로 포항공대 연구팀은 LK-99 단결정을 만드는 과정을 진행했는데, 초전도체가 아닌 매우 적은 양의 열이나 전기를 전달하는 부도체의 특징이 나타났다고 전했다. 이는 해외 연구기관의 재현실험 결과와 같은 맥락이다. 국내 재현실험 이전에 독일 막스플랑크 고체연구소 연구팀은 황화구리 불순물을 제거한 LK-99 순수 단결정을 합성했다. 이어 LK-99 단결정이 자석 위에 뜰 정도로 반자성(외부 자기장을 밀어내는 성질)과 강자성(자기장이 없는 상태에서도 스스로 자기화되어 자석이 될 수 있는 성질)이 강하지 않음을 확인하며, 수백만 옴의 저항을 가진 절연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전기저항이 0이 아닌 특정 값으로 수렴하는데다 자기부상 현상을 일으키는 초전도체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LK-99를 제작한 퀀텀에너지연구소 측은 이에 대해 아무 논평을 하지 않고 있다. 부정적인 의견이 우세하지만, 세계 과학계는 이번 논란을 과거 황우석 사건처럼 연구 부정으로 보지는 않는다. 비록 논문에 엉성한 부분이 있었지만, LK-99 연구진이 제조법을 상세히 공개한 덕분에 전 세계적인 검증이 가능했다. 또 검증 과정이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는 점에서 초전도체 연구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소기의(?) 성과도 있었다. 상온∙상압 초전도체를 만들기가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에, 그저 ‘요란한’ 실패로 받아들이자는 분위기다. 화학자 겸 ‘사이언스’의 필자인 더렉 로위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비록 LK-99가 초전도체는 아닐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자신은 여전히 열광할 준비가 돼 있다”며 초전도 연구자들을 격려하는 메시지를 남겼다. 글: 최영준 과학칼럼니스트/일러스트: 유진성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