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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두루마리. 석가탑 사리함 안 비단보에 싸여 있던 그 두루마리의 지질은 닥종이였다. 1966년 발견돼 세상을 놀라게 했던 그것의 제작 연대는 704~751년. 자그마치 1200년 남짓을 좀벌레에 시달리면서도 두루마리 일부만 닳아 떨어졌을 뿐 그 형체를 온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조히(종이), 조선종이, 창호지, 문종이, 참종이, 닥종이 따위로 불렸던 우리 종이가 ‘한지(韓紙)’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초 중반 서양 종이’양지(洋紙)’가 들어와 주류를 차지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적어도 16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종이들은 지금까지도 그 생생함을 잃지 않는 반면, 기계로 제작되는 현대 한지는 그 보존성 면에서 너무도 퇴보했다. 수입 닥나무, 지나친 표백분 사용 등이 그 이유다.한지는 우리 민족상처럼 강인하고 부드러우며 깨끗할 뿐만 아니라 은은하고 정감이 있다. 또한 질감과 빛깔이 고와 책종이나 화구용으로 조상들의 예술혼을 담는 그릇이 되어 왔다. 이처럼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문화를 가능케 하고 천년 세월을 숨쉬며 살아온 한지는 알고 보면 이 땅에 자라는 질 좋은 닥나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지는 질기고 수명이 오래 간다는 것 외에도 보온성과 통풍성이 뛰어나다. 한지의 우수성은 양지와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한지는 빛과 바람 그리고 습기와 같은 자연현상과 친화성이 강해 창호지로 많이 쓰인다. 한지를 창호지로 쓰면 문을 닫아도 바람이 잘 통하고 습기를 잘 흡수해서 습도 조절의 역할까지 한다. 그래서 한지를 흔히 살아 있는 종이라고도 하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반면 양지는 바람이 잘 통하지 않고 습기에 대한 친화력도 한지에 비해 약하다. 한지가 살아 숨쉬는 종이라면 양지는 뻣뻣하게 굳어 있는 종이다. 한지는 주로 닥나무 껍질에서 뽑아낸 인피섬유를 원료로 하여 전통적 방법인 사람의 손으로 직접 뜬 수록지다. 양지는 나무 껍질에서 목질부(물과 양분의 이동통로로 식물체의 기계적 지지 구실을 하는 부분)를 가공해 만든 펄프를 원료로 하여 기계식으로 생산되는 종이다. 닥나무 인피섬유는 화학펄프로 사용하는 침엽수의 섬유길이(3mm)나 활엽수의 섬유길이(1mm)보다 훨씬 긴 섬유 길이(10mm 내외)를 가지고 있어서 목재 펄프에 비해 조직 자체의 강도가 뛰어나고 섬유의 결합도 강하여 질긴 종이를 만들 수 있다. 한지가 강한 예는 몇 장을 겹쳐 바른 한지로 갑옷을 만든 예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옻칠을 입힌 몇 겹의 한지로 만든 갑옷은 화살도 뚫지를 못한다고 한다. 한지가 천년의 수명을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한지는 화학반응을 쉽게 하지 않는 중성지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신문지나 오래된 교과서가 누렇게 변색되는 이유는 사용된 펄프지가 산성지이기 때문이다. 즉 양지는 지료 PH 4.0 이하의 산성지로서 수명이 고작 50~100년 정도면 누렇게 황화현상을 일으키며 삭아버리는 데 비해, 한지는 지료 PH 9.0 이상의 중성지로서 세월이 가면 갈수록 결이 고와지고 수명이 오래간다.한지의 지질을 향상시킨 또 다른 요인은 식물성 풀에서 찾을 수 있다. 한지는 섬유질을 균등하게 분산시키기 위해서 독특한 식물성 풀을 사용했다. 바로 닥풀이다. 닥풀은 주성분이 당류로서 뿌리에 점액이 많기 때문에 섬유가 빨리 가라앉지 않고 물 속에 고루 퍼지게 하여 종이를 뜰 때 섬유의 접착이 잘 되도록 한다. 특히 얇은 종이를 만드는 데 유리하고 순간적인 산화가 빨라 겹쳐진 젖은 종이를 떨어지기 쉽게 한다. 한지의 질을 더 높인 조상들의 비법은 또 있다. 한지 제조의 마무리 공정인 도침(搗砧)이 바로 그것이다. 도침은 종이 표면이 치밀해지고 광택이 나게 하기 위해 면풀칠한 종이를 여러 장씩 겹쳐 놓고 디딜방아 모양의 도침기로 골고루 내리치는 공정을 말한다. 이는 무명옷에 쌀풀을 먹여 다듬이질하는 것과 동일한 원리이다. 이 도침기술은 우리 조상들이 세계 최초로 고안한 종이의 표면 가공기술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 겨레의 과학슬기가 듬뿍 담긴 전통 한지는 최근 값싼 중국 한지제품과 원료에 밀려 정체성 위기를 맞고 있다. 한옥이 헐리고 아파트가 들어섬에 따라 창호지와 장판지는 유리와 비닐로 대치됐고, 한지는 안타깝게도 더욱 발붙일 곳을 잃어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책, 직지에 쓰인 우리의 종이. 천년의 세월을 견뎌낸 우리의 한지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앞으로 우리 선조들의 과학슬기를 세계 만방에 떨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진정한 과학기술의 세계화라 할 것이다.(글:김형자-과학칼럼리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