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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 족발, 수육이 산더미처럼 쌓인 식탁을 바라보는 태연과 아빠, 행복해서 입을 다물 수가 없다. 태연과 아빠의 비만체형에 유난히 신경질적인 엄마가 이 기름진 지방 덩어리들을 맘껏 먹어도 된다고 허락했다니, 이건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그러니까 이걸 다 엄마가 시켜줬다는 거죠? 아빠가 드디어 기적을 만드신 거예요!” “그렇다니까! 지난번에 TV에 나온 저탄수화물·고지방 다이어트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면서 고기를 못 먹게 할 게 아니라, 차라리 탄수화물을 줄이고 지방을 듬뿍 주면 살이 빠질 거라고 살살 설득했거든.” “저도 그 얘기 듣긴 했어요. 요즘 제 친구 중에도 급식 시간에 밥 대신 치킨 먹겠다고 우기는 애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진짜 고기만 먹으면 살이 빠져요?” “물론이지. 저탄수화물·고지방 다이어트는 탄수화물 섭취를 전체 칼로리의 5~10% 수준으로 줄이고, 대신 지방 섭취를 70% 이상으로 늘리는 다이어트법이야. 탄수화물을 먹으면 지방을 체내에 축적하는 인슐린이 다량 분비돼 살이 찌지만, 지방은 인슐린 분비를 크게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포만감은 더 많이 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체중감량 효과가 생긴다는 거지. 그래서 단기간 살 빼는 데는 꽤 효과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어.” “배터지게 고기도 먹고 살도 빼다니. 이런 걸 두고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잡고, 마당 쓸고 동전 줍고 라고 하는 거죠!” “너무 좋아할 거 없어. 말짱 도루묵이니까.” “예에?!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오래 실천하는 게 무척 힘든 다이어트법이거든. 실패하면 바로 요요현상이 올 거고, 더 살찌는 체질로 바뀔 가능성이 높아.” “에이, 쉬운 다이어트가 어디 있어요. 아빠도 엄살은.” “그냥 어려운 게 아니라 완전 어렵다니까! 탄수화물은 우리 몸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면서 동시에 뇌 활동의 유일한 에너지원이야. 탄수화물이 부족해서 혈액 속의 포도당 농도가 낮아지면 뇌 기능이 급격히 떨어지고 심하면 의식을 잃을 수도 있어요.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다 보니, 인체는 탄수화물 섭취 관리를 아주 철저하게 한단다. 탄수화물 공급이 줄어들면 강한 스트레스를 주고, 반대로 탄수화물이 많아지면 도파민이라는 행복물질을 내보내는 식으로 탄수화물 양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는 거지. 도파민은 마치 마약처럼 중독성이 높은데, 이는 뇌가 마약을 써서라도 탄수화물 공급량을 절대적으로 확보하고 싶어 한다는 뜻이기도 해. 뇌가 이렇게 갖은 노력을 하는데 몇 년씩 혹은 평생 탄수화물 극단적으로 줄이는 다이어트를 하는 게 어디 쉽겠냐?” “헐, 탄수화물 줄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줄은 정말 몰랐어요.” “거기다 탄수화물은 아주 예민한 녀석이기도 해. 탄수화물 섭취량을 줄이면 급격히 힘이 빠지거나 기분이 나빠지고, 두뇌회전이 안 되는 멍한 상태가 돼버려요. 하지만 반대로 양이 조금만 과해도 곧바로 지방으로 전환돼 살이 쪄버리지. 항상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되는 게 바로 탄수화물이야. 그래서 장기간 성공적인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서는 고기만 먹기보다는 밥 양을 10~30% 정도 꾸준히 줄이거나, 잡곡빵과 현미밥 같이 인슐린 분비를 과도하게 자극하지 않는 탄수화물을 먹는다거나, 또는 각종 채소나 단백질과 함께 먹어서 인슐린 분비를 줄이는 식의 습관을 들이는 게 훨씬 효과적이란다.” “뭐야, 좋다 말았어요. 고기 먹고 살 뺀다기에 엄청 설렜는데.” “건강을 위해서도 저탄수화물·고지방 식이는 권장할 만한 방법이 아니야. 이 다이어트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빠르게 늘어나자, 큰일 났다 싶었던 의학·건강 관련 전문학회(대한내분비학회, 대한당뇨병학회, 대한비만학회, 한국영양학회, 한국지질동맥경화학회)가 공동성명까지 발표했단다. 포화지방 과다섭취로 심혈관질환과 대장질환에 잘 걸리고,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기 어려워 여러 질병에 걸리기 쉬우니 가급적 이 다이어트를 피하라는 주의를 준 거지.” “흑, 아쉽기는 하지만, 이 행복한 다이어트는 오늘로 끝내야겠어요. 그런데 아빠, 저탄수화물·고지방 다이어트에 문제가 많다는 걸 뻔히 알면서 엄마를 설득한 이유는 대체 뭐예요?” “딸아, 아빠와 몸매가 무척이나 흡사한 내 딸아. 눈앞에 펼쳐진 이 고기 파라다이스를 보고도 그런 질문이 나오느냐? 간만에 네 엄마의 철저한 건강 식단에서 벗어나 고기파티라는 짜릿한 일탈을 즐기고픈 아빠의 심정을 너는 알고도 남을 텐데?” “데헷! 들키고 말았네요. 실은 아까부터 아빠의 흑심에 적극 동참하고 있었거든요. 역시 우린 잘 통한다니까요!” 글 : 김희정 과학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