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
“오늘 날씨는 참 따뜻해요. 그곳은 춥지 않죠? 포근한 곳에서 잘 지내시길 바랄게요.”2003년 12월, 고무보트를 타고 탐사활동을 벌이다 남극 바다에 빠져 숨진 고 전재규 대원의 추모 홈페이지엔 아직도 네티즌들이 추모의 글을 올리고 있다. 당시 사고를 당한 대원 5명 중 4명은 구조됐지만, 전재규 대원은 결국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숨져 시신으로 돌아왔다.“쇄빙선 한 척만 있었더라면….”전재규 대원 이야기가 나오면 해양 과학자들은 한숨을 내쉬며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얼음 바다를 부수며 항해할 수 있는 쇄빙선은 우리나라 극지 연구자들의 ‘한’ 이었다. 남극에 상주기지를 운영 중인 20개국 중 쇄빙선이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폴란드, 단 두 곳뿐이다.쇄빙선이 꼭 필요한 날만 하루 8,000여만원을 주고 러시아 등에서 빌려 사용하고 있는데, 그나마 빌릴 수 있는 기간이 제한돼 가고 싶은 곳을 마음껏 다니기 어려웠다. 연구하기에 적합한 시기인 11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는 다른 나라들도 쇄빙선을 사용하고 있어 빌리는 것조차 어렵다.그러나 이런 한이 풀릴 날이 성큼 다가왔다. 지난 6월 11일은 우리나라 극지 연구자들로서 기념할 만한 날일 것이다. 국내 최초의 쇄빙선 아라온호가 바닷물 위로 떠 오른 날이기 때문이다. 정식 출항까지는 시간이 남아있지만, 국내 최초의 쇄빙선이 드디어 물위에 떠오른 사실 만으로도 한 많았던 과학자들에겐 감격스런 날로 기억 될 것이다.쇄빙선이 왜 이렇게 중요한 것일까? 아라온호의 완성은 단순히 배 한 척 확보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미 세계 각국에서도 우리나라를 극지연구에 관한한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고 평가하고 있다.쇄빙선이 있으면 남, 북극기지를 새로 건설하거나 운용하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현재 우리나라의 남극기지는 세종 기지 한 곳 뿐으로 미국의 3개, 영국·호주의 4개에 비해 적다. 더구나 세종기지가 있는 킹조지섬은 남극 치곤 꽤 따뜻한 곳이다. 남극점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 여름에는 풀이 돋을 때도 많다. 조류나 생태연구에는 적합하지만 진정한 극지연구를 하기엔 무리가 있다.결국 극지연구소는 총 700억 원을 들여 두 번째 기지를 건립할 계획을 발표하고 지난 해 부터 본격적인 탐사에 들어갔다. 이런 계획도 우리나라의 쇄빙선 제작이 확정된 다음에야 결정될 수 있었다. 쇄빙선 없이는 물자를 보급할 수도, 실험기자재를 옮겨 놓기도 어렵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아라온호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 것일까?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 남, 북극의 혹한 지역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탁월한 쇄빙능력이다. 아라온호는 두께 1m의 얼음을 깨며 3노트(시속 5.5km)로 운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얼음이 없으면 16노트(시속 30km 정도)까지 속도를 낼 수 있다.이런 성능의 비결은 아라온호만의 독특한 구조 덕분이다. 선저(배의 아랫부분)에는 얼음을 자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아이스나이프가 달려 있다. 뱃머리 부분은 해군의 대형상륙함 독도함보다 2배나 두꺼운 4cm의 강철판으로 만들어졌으며 선체에 칠하는 도료도 돌덩이처럼 단단하다. 딱딱한 얼음에 배가 파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갑판이 얼어붙는 걸 막기 위해 갑판 전체에 열선도 깔려 있다.극도로 추운 날씨에선 배 주위에 있던 바닷물까지 얼어붙곤 한다. 쇄빙선이라도 이런 상황에선 얼음위로 점점 밀려 올라가기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기도 한다. 이럴 때를 대비해 아라온호는 배를 좌우로 흔들어 얼음을 깨는 기능도 갖추고 있다. 선체 앞머리를 최대 5m까지 들어 얼음을 짓눌러 깰 수도 있다. 아라온호의 바닥에는 300톤에 달하는 물을 싣고 있는데, 이 물을 옮겨 가며 배 자체의 무게중심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얼음을 깨기 위해서는 배 자체의 무게도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배보다 훨씬 무겁게 만들어졌다. 총 무게 6,950톤으로 2000~3000톤 정도인 일반 연구선보다 훨씬 무겁다.다른 배의 3~4배에 달하는 압도적인 힘도 자랑거리다. 아라온호에는 6,800마력에 달하는 대형 엔진 2개가 장착돼 있어 보통 배의 3~4배가 넘는 힘을 낸다. 웬만한 얼음은 그대로 부수면서 전진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는 것이다.앞 쪽의 얼음이 너무 두꺼워 더 이상 전진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아예 피하는 기능도 갖췄다. 아라온호는 길이 막히면 그대로 후진하거나, 좌우로 수평 이동할 수 있다. 후미에 달린 2개의 프로펠러가 360도 회전하기 때문이다.아라온호가 각광받는 또 다른 이유는 남, 북극 기지를 충분히 지원할 수 있는 수송선이라는 점이다. 아라온호는 길이 110m, 폭 19m가 넘는다. 한번 보급을 받으면 70일간 약 2만해리(약 3만7,000km)를 항해할 수 있으며, 배 뒷편에는 25톤 크레인이 달려있어 자체 하역까지 가능하다. 대형컨테이너나 트럭 같은 물건도 배에 올리고 내릴 수 있어서 어지간한 물자는 모두 아라온호 만으로 보급이 가능하다.대형 헬리콥터 착륙장과 격납시설을 갖추고 있는 것도 큰 장점이다. 배로 접근하기 어려운 극지 내륙지역까지 물자와 인력을 보내 줄 수 있는 셈이다.아라온호가 얼음을 부수며 보급업무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영하 30도에서 영상 50도까지 견딜 수 있어 극지와 적도를 전천후로 누빌 수 있다. 또 본격적인 연구 장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해양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다. 말 그대로 움직이는 해양연구소이다.아라온호는 진동을 최소화하기 위해 디젤엔진을 사용하지 않고, 전기엔진 2대를 이용한다. 떨림이 적고 조용해 바다 위에서 연구를 하기에 적합하며, 자동위치유지장치 덕분에 해류가 흐르거나 바람이 불어도 배가 정해진 위치에 그대로 떠 있을 수 있다. 바다 위에서 안정적으로 연구활동을 수행하기 위한 조치다.총 탑승인원 85명 중 60여명이 과학자며, 첨단 연구장비만 해도 60가지가 넘는다. 입체 현미경 등 총 48개 실험장비를 갖췄으며, 바닷물 성분을 확인하는 CTD 등 해양, 생물용 연구장비가 다수 실려 있다. 대형 지질, 지구물리 연구장비와 함께 기후 연구를 위한 기상, 대기, 모니터링 장비까지 설치돼 있다. 이런 역량 덕분에 선진국들로부터 공동협력 제안도 이어지고 있다.아라온호는 선박 내부를 단장한 뒤 이르면 9월말 인천에 있는 극지연구소에 인도되며, 11월 말에 과학자들의 한을 모두 털어내고 남극으로 출항하게 된다. 이후에는 각종 시험 항해를 거쳐 2010년부터 본격적인 탐사와 연구활동에 나설 계획이다.사람들이 남, 북극 연구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석유와 천연가스가 가득한 자원 보고이기 때문이다. 세계 강대국들이 40여 척의 쇄빙선을 운용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11월 다가올 아라온호의 첫 항해가 우리나라를 자원강국으로 만드는 첫 걸음이 되길 기대해 본다.전승민 동아사이언스 과학전문기자 KISTI NDSL(과학기술정보통합서비스) 지식링크○관련 논문 정보 쇄빙선박에 작용하는 빙저항 추정식 고찰 [바로가기] 빙해 항행 선박 주요목의 변화 경향에 대한 조사 연구 [바로가기] 극지용 쇄빙 유조선 개발 [바로가기] ○관련 특허 정보 쇄빙용 부가 추진 시스템과 쇄빙선(한국공개특허) [바로가기] 선박의 조종성을 향상시킨쇄빙선(한국등록특허) [바로가기] 유빙충돌방지 내빙선(한국공개특허) [바로가기] ○해외 동향분석 자료 33년 운항된 원자력 쇄빙선 아크티카호 퇴역 - 2008년 [바로가기] 러시아, 세계 최대 원자력 추진 쇄빙선 성능 시험 착수 - 2007년 [바로가기] 온난화에도 남극의 빙하가 증가하는 이유 - 2009년 [바로가기] |